한스아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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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아담 1세 (1657–1712)는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재건과 위상 강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가문의 자산과 영지를 재편하고, 30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토지 매입과 사업 확장을 통해 수입원을 다각화했으며, 빈에 궁전을 건설하고 예술품을 수집하는 등 문화 활동에도 힘썼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추밀 고문관과 금양모 기사단 기사로 활동했으며, 황실 재정 관리에도 기여했다. 셸렌베르크와 파두츠 백작령을 매입하여 리히텐슈타인 공국으로 승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건축과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리히텐슈타인 시가 궁전과 리히텐슈타인 정원 궁전을 건설하고, 미술품을 수집하여 가문의 컬렉션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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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아담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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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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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
전체 이름 | 요한 아담 안드레아스 |
작위 | 트로파우 공작 예거른도르프 공작 |
출생일 | 1662년 8월 16일 |
출생지 | 브륀 |
사망일 | 1712년 6월 16일 |
사망지 | 빈 |
매장지 | 성모 탄생 교회, 브륀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통치 | |
국가 | 리히텐슈타인 |
즉위일 | 1684년 4월 5일 |
퇴위일 | 1712년 6월 16일 |
이전 통치자 | 카를 에우제비우스 |
다음 통치자 | 요제프 벤첼 1세 |
가문 | |
가문 | 리히텐슈타인 가문 |
아버지 | 카를 에우제비우스, 리히텐슈타인 공작 |
어머니 | 요한나 베아트릭스 폰 디트리히슈타인 |
배우자 및 자녀 | |
배우자 | 에르트무테 마리아 폰 디트리히슈타인-니콜스부르크 공녀 |
자녀 | 마리아 테레지아, 수아송 백작부인 |
2. 생애
리히텐슈타인 공작 카를 오이세비우스와 그의 아내 요한나 베아트릭스 폰 디트리히슈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 후에는 가문의 자산과 영지를 재편하고 재정 재건에 힘썼다. 뛰어난 재정 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1687년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에 의해 추밀 고문관으로 임명되었고, 1693년에는 금양모 기사단 기사가 되었다.
황실 재정 개혁을 시도하고 개인 은행을 설립하기도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며, 이후 외교관 활동에 주력하여 1707년 헝가리 의회에 황제 위원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가문의 오랜 숙원이었던 제국 의회 진출을 위해 1699년 셸렌베르크, 1712년 파두츠 등 제국 직속 영지를 구입하여 후대에 의회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697년에는 모라비아 북부의 슈테른베르크 영지도 구입했다.)
또한 예술에 조예가 깊어 현재 리히텐슈타인 가문 미술 컬렉션의 핵심을 이루는 많은 작품을 수집했으며, 빈에 리히텐슈타인 시가 궁전과 정원 궁전을 건설하는 등 건축 후원에도 힘썼다. 빈의 알저그룬트 지구에는 그를 기념하여 명명된 리히텐슈타인슈트라세(Liechtensteinstraße) 거리가 있다.
두 아들이 먼저 사망하여 직계 후계자 없이 1712년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브라노프의 가문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가문 영지는 잠시 요제프 벤첼이 관리하다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돌아온 사촌 안톤 플로리안이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리히텐슈타인 공작 카를 오이세비우스와 그의 아내 요한나 베아트릭스 폰 디트리히슈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친척 관계로, 아버지는 어머니의 삼촌이었다.2. 2. 공작가의 재건과 재정 개혁
공작이 된 후 아버지 카를 오이세비우스의 유지를 이어받아 공작가의 자산과 영지를 재편하고 재정 재건을 추진했다. 그의 뛰어난 재정 관리 능력은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도 인정받아 1687년 추밀 고문관으로 임명되었고, 1693년에는 금양모 기사단 기사로 서임되었다.황실 재정에도 관여하여 황제 관방의 조직 관리 체제 합리화를 시도했으나, 1699년 관방 직원들의 반발로 황제가 이를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또한 개인 은행인 빈 예금환급은행(Wiener Girobankdeu)을 창설하여 1703년부터 1705년까지 총재를 맡았지만,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 실패 이후 경제 전문가로서의 활동보다는 외교관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1707년에는 프레스부르크에서 열린 헝가리 의회에 황제 정부의 위원(Kommissar)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가문의 지위 향상을 위해 영지 확보에도 힘썼다. 1697년 실레지아의 에르스 공작 실비우스 2세로부터 모라비아 북부의 슈테른베르크(Šternberkcze) 영지와 성을 구입했다. 더 중요한 성과는 1699년 셸렌베르크와 1712년 파두츠를 구입한 것이다. 이 두 영지는 제국 직속 영지였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직접적인 영지를 소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제국의 제후 칭호는 있었으나 제국 내 직속 영지가 없어 제국 의회에 의석을 갖지 못했다. 이 영지 확보는 훗날 그의 후계자 안톤 플로리안이 1719년 제국 의회 제후부(Fürstenratdeu) 의석을 얻는 기반이 되었으며, 이는 가문의 오랜 숙원이었다.
2. 3.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활동
1687년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에 의해 추밀 고문관으로 임명되었고, 1693년에는 금양모 기사단의 기사로 서임되었다. 그는 가문의 재정 관리에 뛰어난 수완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황실로부터도 그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다. 요한 아담은 황제 관방의 조직 관리 체제를 합리화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1699년 관방 직원들의 반발로 인해 황제에게 거부당했다. 또한 개인 은행으로 빈 예금환급은행(Wiener Girobankde)을 창설하여 1703년부터 1705년까지 총재를 맡았지만,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 실패 이후, 그는 경제 전문가로서의 활동보다는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에 집중했다. 1707년에는 프레스부르크에서 열린 헝가리 의회에 황제 정부의 위원(Kommissar)으로 파견되었다.한편, 요한 아담은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오랜 숙원이었던 제국 의회 진출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제국 제후의 칭호는 있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제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영지, 즉 제국 직속 영지가 없어 제국 의회에 의석을 갖지 못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1699년 셸렌베르크 영지를, 1712년에는 파두츠 영지를 구입했다. 이 두 영지는 이른바 제국 직속 신분의 장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인 1719년 후계자 안톤 플로리안 대에 이르러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마침내 제국 의회의 제후부(Fürstenrat) 의석을 얻게 되었다. 이는 요한 아담의 영지 확보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었다. (1697년 모라비아 북부의 슈테른베르크 영지 구입도 있었으나, 이는 제국 직속령 확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었다.)
2. 4. 슈테른베르크, 셸렌베르크, 파두츠 구입
1697년, 한스아담 1세는 같은 실레지아에 영지를 가진 에르스 공작 실비우스 2세로부터 모라비아 북부에 위치한 슈테른베르크 영지와 성을 사들였다. 이어서 1699년에는 스위스 국경 근처의 셸렌베르크를, 1712년에는 그 남쪽에 있는 파두츠를 차례로 구입했다.특히 셸렌베르크와 파두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직접 속하는, 이른바 제국 직속 영지(Reichsunmittelbarkeit)였다. 이전까지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제국의 직속 영지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후의 칭호는 있었으나 제국 의회에 참여할 권한은 없었다. 이 두 영지를 확보함으로써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마침내 제국 의회에 의석을 얻을 자격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가문의 오랜 숙원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영지 획득을 기반으로, 한스아담 1세의 후계자인 안톤 플로리안은 1719년 리히텐슈타인 가문 최초로 제국 의회의 제후부 의석을 얻게 된다.
2. 5. 미술품 수집과 건축 후원
한스아담 1세는 뛰어난 미술품 수집가이자 후원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현재 리히텐슈타인 후작 가문의 주요 미술 소장품 상당수는 한스아담 1세 시대에 수집된 것이다.또한 빈 시내에 화려한 궁전 두 채를 건설했는데, 이는 리히텐슈타인 시가 궁전(Stadtpalais Liechtenstein)과 리히텐슈타인 정원 궁전(Gartenpalais Liechtenstein)이다. 1862년 빈의 제9구역 알저그룬트(Alsergrund)에는 그를 기념하여 '리히텐슈타인슈트라세'(Liechtensteinstraße)라는 거리 이름이 붙여졌다. 같은 구역에 있는 정원 궁전 앞 거리인 '퓌르스텐가세'(Fürstengasse, '후작의 길'이라는 의미) 역시 간접적으로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2. 6. 말년과 후계
두 아들을 먼저 잃었기 때문에 직계 후계자가 없었다. 1712년 사망하자, 본래 상속자인 사촌 안톤 플로리안과 그의 아들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 중이라 자리를 비웠다. 이에 따라 안톤 플로리안의 조카인 요제프 벤첼이 일시적으로 리히텐슈타인 가문 영지의 집정관이 되었다. 한스아담 1세의 유해는 브라노프에 있는 가문 납골당에 안장되었다.3. 결혼과 자녀
한스아담 1세는 1681년 2월 16일 빈에서 그의 사촌인 에르트무테 마리아 테레지아 폰 디트리히슈타인(1652년 4월 17일 ~ 1737년 3월 15일)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페르디난트 요제프 폰 디트리히슈타인 후작의 딸이었다. 부부는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으나, 두 아들이 모두 그보다 먼저 사망하여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
3. 1. 에르트무테 폰 디트리히슈타인과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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